[하라/현아] 세 가지 소원 上 Fan fiction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책상 위에 놓여져있던 종이컵은 따가운 창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직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커피가 줄줄 흘러나와 그림을 그리듯 바닥을 적셔갔다. 기묘한 대치속에서 마치 음소거를 해놓은 듯이 모든 것이 조용했다. 심지어는 둘 사이의 공기마저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제 앞에 죄인마냥 고개를 푹 수그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하라의 작은 머리통을 멀뚱히 보던 현아는 이내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린 하라에게 죄는 없었다. 누구나 커가는 과정에서 충분히 한번쯤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저 또한 어렸을 적에 그랬던 적이 없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하라처럼 행동으로 감정을 분출하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 똑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 이해한다, 이해해.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선 학생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된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분명 방금전까지만해도 온 몸을 지배하던 두려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니, 아직까지 떨리는 손을 보면 꼭 그런것만도 아닌 것 같았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지루한 대치는 현아가 하라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 끝이 났다.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느낌에 고갤 들은 하라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항상 싱글벙글 웃음이 끊이지 않아 보는 사람들마저 덩달아 즐겁게 해주던 아이였는데, 자기가 울린 것 같아 뜨끔했다. 물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는지 두 손으로 눈가를 벅벅 비볐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두 손으로 하라의 볼을 가볍게 잡았다.







“다 이해해.”

“…….”





잠시동안 그 말의 의미를 정리하는 듯 하라의 고개가 약간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결론이 났는지 그나마 멈춰가던 눈물이 다시 비죽 튀어나오더니 으앙! 하고 더 크게 울어버린다. 그런 하라를 말없이 안아줬다. 이곳이 교무실이 아니라 자신의 집인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도대체 이 갸날픈 체구에서 어찌 이런 우렁찬 울음소리가 나올 수 있는건지. 아마 내일쯤에 옆집 사람들의 불만이 들어올게 분명했다. 다행히 창문까지 닫고 있어서 망정이지. 시간이 지나도 서럽게 우는 걸 멈출줄 모르는 하라를 가볍게 끌어 방으로 데려갔다. 얼마나 밖에서 기다렸던건지 아직도 맞잡은 손이 꽁꽁 얼어있었다. 이제 더위가 몰아칠 시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밤에는 쌀쌀한 편이라 밤에는 옷으로 무장해야하는데, 안그래도 짧다고 학부모들의 불만이 많이 들어오는 교복 치마에 위에는 마이 하나 없이 교복 셔츠만 입고 기다렸으니 오죽할까. 장장 십여분을 더 울은 다음에야 진정이 됐는지 떨리던 어깨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탈수증세까지 오진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눈물을 뺀 하라를 위해 부엌으로 달려가 이가 얼얼한 정도로 시원한 물을 가져왔다. 힘이 다 풀린 몸이 갑자기 들어오는 차가운 물에 놀랐는지 켁켁거리면서도 한잔 가득 채워져있는 걸 모두 비웠다.









퉁퉁 부은 눈이 하라를 아는 사람이 보면 몰라볼 정도여서,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하라는 뭐가 아직도 그렇게 미안한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참 이상했다. 분명 무척 무서웠고 당황하긴 했지만 이렇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 여려서 그런가. 그런가보구나. 말없는 하라의 턱을 가볍게 잡아 고갤 들게 했다. 축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면서 활짝 웃으니, 그제서야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하라가 갑자기 이 늦은 밤까지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유를.

















‘키스하고 싶어요. 선생님하고.’









처음 꽁꽁 얼어 눈사람이 되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차가워져있던 하라를 집 안으로 데려오자마자 내뱉은 첫마디였다. 차가워진 손을 붙잡고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오는데 그 말을 듣고 거짓말처럼 그대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잘못들은 건 아닌가 싶어 채근하듯 바라봤다. 하지만 하라에게서 평소 따스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마치 감정 없는 인형처럼 창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태풍이 휘몰아치듯 거칠게 떨리는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귀신이라고 생각하고 비명을 지를 뻔할 정도였다.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이 사르르 풀렸다.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방금 들어와서 서늘하게 맴도는 공기가 마치 수갑처럼 몸에 걸려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하라가 한발자국 다가왔다.















‘하, 하라야. 잠깐만….’







꿈을 꾸고 있는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아는 구하라는 지금처럼 이렇게 섬뜩한 장면을 연출해낼 정도로 무서운 아이가 아니었고,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였기에 저를 향해서 입맞추고 싶다는 말을 하는 하라의 모습은 더더욱 현실성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악몽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어린 생각은 등에 닿는 벽의 감촉에 의해서 지우개로 지우듯 깨끗하게 사라졌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강제로 현실로 돌아온 탓인지 벽에 기댄 후부터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다가오는 하라의 냉혹한 얼굴 때문에 겁이 나서 울고 싶었지만 눈물샘조차 굳어버린건지 토끼눈처럼 충혈되기만 할 뿐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숨을 들이마시는 느낌까지 여실히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하라는 잠시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현아를 내려다봤다. 스스로가 떨고 있는지 알지 못한 현아는 잠깐의 정적속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하라가 이제 금방이라도 ‘속았죠? 메~롱!’이라면서 혀를 내밀고 웃을 것만 같았다. 아니, 제발 그러길 바랬다. 하지만 현실은 바램을 부정했다. 잠깐의 멈춤이 기폭제가 되었던건지 하라는 다가올 때보다 더욱 더 난폭하게 현아에게 입을 맞췄다. 애타게 이름을 부르려던 음성은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했다. 거의 배려심 따위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본능만 가득한 행위였다. 굳게 앙다문 입술에 계속해서 입술을 부딪치는 바람에 얼얼해서 그렇게 메말라있던 눈물샘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해보이는 하라는 보이지도 않는지 벽을 짚어 현아를 결박하고 있던 왼손으로 턱을 슬며시 붙잡아내려 강제로 입술을 벌리게 했다. 읍읍거리며 도리질치던 현아는 굳게 잠겨있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말캉한 느낌에 온 몸에서 벼락을 맞은 듯 파닥거렸다. 하라의 혀가 들어오자 그 뒤로는 일방적인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평소 남들보다 더 민감한 편이라 조금만 닿아도 움찔움찔하던 현아에게 지금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너무나 거친 행위는 금새 더 이상의 사고를 용납하지 않았다. 밀고들어오는 혀는 겁먹은 듯 움츠려있던 현아의 혀를 붙잡아 잠시동안 얽히고 설키는 추격전을 벌였다. 이미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린 현아에게 있어서 그 승부의 결과는 물을 보듯 뻔했다. 결국에는 입 안을 허용한 그 다음부터는 고른 치열을 훑거나 혀뿌리를 건드리는 미지근한 감촉에 결국에는 휘청했다. 하지만 하라는 그런 작은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현아를 번쩍 들어 강제로 제 허리에 두 다리를 얽히게 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붕 뜨는 느낌이 든 현아는 도대체 금방이라도 건드리면 똑 부러질 것 같은 얇은 체구에서 저런 괴력이 나는건지 의아했다.







배려심 없는 키스는 괴로웠다. 이미 입술을 타고 흘러 옷을 잔뜩 적시고 있는 타액들에 미칠것만 같았다. 지금껏 느껴보지도 못했던 생생하고 강렬한 감각에 온 몸은 뜨겁게 흥분하는데, 머릿속에선 이 감각을 받을만큼 성숙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감각과 이성의 충돌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버리는 것 같았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무의식중에 하라의 어깨를 팡팡쳤다. 그제서야 잠깐 공격을 멈추고 고개를 뗐다. 그제서야 한번에 공기가 잔뜩 벌어진 입속을 통해 폐속으로 들어왔다. 빈혈이 온 것마냥 아찔했다. 키스만으로도 한계 이상의 쾌락을 느낀 온 몸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마냥 경련했다. 너무 발버둥친 탓에 이미 벽에 기댄 등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지만 온 몸에 남아있는 흥분의 잔재에 분출된 엔돌핀에 의해 고통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입가에 흘러내린 타액을 지울 생각조차 못하는 현아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하라는 다시금 공격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던 현아는 슬그머니 다가오는 공포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높은 비명을 질렀다.







뚝.





하라의 눈동자에 그제서야 구하라가 돌아왔다. 그녀는 잠시동안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이 끝나지 않은 듯 멈춰있다가, 제 허리에 다리를 얽힌채 바들바들 경련하고 있는 현아를 보고나서야 눈가에 공포가 깃들었다. 저도 모르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현아의 두 발이 바닥에 닿았지만 지탱할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저앉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놀라서 황급히 일으켜주려던 하라의 손길은 다가옴과 동시에 잔뜩 움츠리는 현아의 행동에 의해 닿지 못했다. 현아는 울고 있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현아의 얼굴에서 눈물이 나는 걸 본적이 없는데, 자신이 처음이었다.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생각이 미치자 하라는 자신의 두 손발을 다 잘라버리고 싶고, 울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 제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하라는 그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뜨겁게 뛰던 심장은 현아의 눈물이 중력에 의해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순간마다 새까맣게 타버리고 있었다.







‘선, 선생님…….’

‘…….’







차라리 증오로 가득한, 더 이상 너같은 건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바라봐줬으면 비참하지만 속이라도 편했을텐데, 현아는 그저 잔뜩 젖은 눈으로 하라를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억겁처럼 느껴졌던 찰나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느껴지자마자 하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맨다리로 바닥에 부딪히는 바람에 연약한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나는데도 아픈 것보다는 내일 아침, 아니 이 순간부터 현아가 자신을 더 이상 관심 갖지도, 웃어주지도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먼저였다.











그 뒤로는 스스로가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무리 달래도 눈물을 멈추지 않고 오열하는 바람에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현아가 몸을 추스르고 하라를 달랬다. 고장난 라디오처럼 하라는 울면서도 쉴새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하라를 다그치려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나 서럽게 우는 하라를 보자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아마 방금의 기억은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을 강렬하면서도 충격적인 기억이긴 하지만, 단지 한발만 물러서면 둘 모두 괜찮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용납하지 않을 생각인데도 왜 하라에 대해서만 이렇게 관대한 입장을 취하는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방금전까지만해도 거실을 가득 메우던 광기의 여운은 지독한 고요함으로 바뀌어버렸고, 그 고요함을 깨는 하라의 울음소리와 함께 미안하다는 중얼거림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









“그만 울구. 뚝!”

“죄송해요….”

“우리 하라, 미안한 건 아나봐?”

“…….”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잔뜩 흐트러지다 못해 거친 반동으로 인해 단추까지 떨어져버린 블라우스를 계속 입고 있을 순 없어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왔다. 이 늦은 시간에 하라를 돌려보내는 것도 솔직히 불가능해서, 지금쯤이면 집에 난리가 났을 지도 몰라 하라의 집에 전화해서 대충 둘러댔다. 역시나 애지중지하는 딸이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아 집안이 비상사태라고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듯이 말씀하시는 하라의 부모님에게 하라가 몸이 안좋은거 같아서 학교에서 바로 제 집으로 데려왔다며 장장 5분에 걸쳐진 설득 끝에 간신히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끝자마자 터져나오는 안도의 한숨. 바로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하라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현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고개를 수그리고 애꿎은 치맛자락만 구겼다.





다행히 내일이 놀토라서 다행이었지, 아침 5시에 일어나야하는 평일이었다면 아마 울고 싶었을거였다. 도대체 겁먹고 불안해야할 건 내쪽인데 왜 내가 달래다 못해 또 울까봐 노심초사해야하는건지. 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같았으면 아마 지금쯤 집안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다 던지고 사생결단이 났으리라. 애써 다른 생각을 해가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하라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학교에서 꿀밤하면 알아주는 매운 손이라 경쾌한 소리와 함께 꺅, 하는 비명이 터졌다. 서있어서 그런지 앉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하라의 불안한 얼굴이 평소보다 귀엽게 느껴졌다. 방금까지만해도 정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공포영화같았는데. 어쩜 이렇게 자유자재로 바뀌는거지.





바로 옆에 앉으니 오히려 하라가 더 놀란 듯 몸을 뺐다. 하지만 별다른 내색은 안했다. 비현실같은 현실속 상황속에서도 자기의 제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한다는 알 수 없는 사명감이 들었다. 저를 좋아한다는, 아니 사랑한다는 말은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맘속 아주 깊숙한 곳에서는 기쁘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듯, 자기를 사랑해준다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런 작은 아이러니함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말을 해줘야 더 이해를 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까 말없이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로 먼저 말문을 뗀건 하라였다. 긴 머리카락에 옆모습이 가려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목소리가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의 떨림은 거짓말이었던것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어려서 그런거라고 할거죠?”



“뭐?”



“어리니깐… 사랑하고 동경하고 차이를 잘 몰라서 그런거라고… 말하려고 하는거잖아요….”



“…….”







하라는 제 무릎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서 눈물을 참았다. 그 탓에 간신히 큰 밴드로 붙여 멎어있던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배어나왔다. 아플만도 한데 인상을 찡그리기는커녕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마주하자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릎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잡으면서 하라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아니에요. 저도 진짜 제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건지 알고 그냥…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다른 애들도 나랑 똑같은 감정 느끼겠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저도 여기저기서 많이 읽었어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서워서 일부러 스스로 아니라고 피했나봐요….”



“하라야, 잠깐….”



“선생님이 좋아요. 이건 동경도 아니고 그냥 어려서 이런게 아니에요… 지금도 두근거려요. 미치겠어요. 근데 좀전처럼… 또 몹쓸 짓 할까봐 무서워요... 선생님이 다시는 나 안봐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차라리 죽고 싶어요….”







아아, 얼마나 고민했을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여린 등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지금 하라가 바라는 건 그런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는 언제나 미소 뒤에 슬픔을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하라보다 여섯 살이나 더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어봤던 자기도 아직 감정을 감춘다는 걸 잘 하지 못하는데, 아직 한참 사랑받고, 웃어야 할 열아홉의 하라가 할 수 있었을까. 아마 많이 울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이, 지금처럼 달래주는 사람 없이, 고민을 들어줄 사람 없이 홀로 많이 울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하라에게 미안하고, 눈물이 났다.







목구멍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따가웠지만, 한자한자 또박또박 힘겹게 끊어가며 말했다.







“안싫어해… 하라를 내가… 왜 싫어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해줄수도, 해주지 않는게 더 낫다는 걸 알고선 우린 말없이 침묵을 하다가도, 정말 사소한 이야기, 예를 들어 같은 반의 누구가 누굴 좋아한다느니, 자기가 언제 입고 왔던 치마가 진짜 이뻤다느니, 어떤 아이돌한테 관심있냐는 둥을 밤새도록 떠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선을 넘어선, 자기에 대한 이야기나 하라에 대한 말은 서로 하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현아는 가슴이 텅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은 오묘한 기분이 마치 심장에 말을 걸 듯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칠흑같은 밤의 머릿결이 걷히고 커튼 틈새로 새벽녘의 잔재들이 산산히 부서져 들어올 때까지 그 기분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언제 잠이 든지도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방금 일어났다기엔 새벽동안의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몽롱한 느낌도 들지 않아서 벌떡 일어섰다. 방안에는 분명히 있어야할 하라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하룻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작은 흔적조차 하나 없이 사라져버렸다. 등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과 침대 옆 테이블 위 거울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의 오밀조밀한 글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꿈이었던거라고 치부해버렸을 것이다.









말없이 먼저 가서 미안해요. 월요일날 봐요, 선생님.









뗐던 포스트잇을 다시 거울에 붙였다. 거울에 비춰진 저의 모습은 놀랍게도 울상 짓고 있었다. 잠시동안 왜 내가 울상 짓고 있는지 의아해하던 현아는 퍼뜩 놀랐다. 믿기지 않게도 분명 자신은 하라가 가버린 것에 대해 섭섭해 하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거라고 생각하면서 커튼을 홱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하다 못해 억소리 나오는 매서운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 두 볼을 손으로 아프지 않게 짝짝치고 깊게 쉼호흡 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거울에는 웃고 있는 제 모습이 보였다.





포스트잇에 써진 글중에 맨 마지막,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다. 현아는 하라가 정말 괘씸했다. 매너없게 피해자는 자긴데 말없이 달랑 쪽지 하나만 써놓고 갔을뿐더러, 사실 어제의 키스는….







“첫키스였는데….”







매만지는 입술은 아직도 뜨거웠다.





-





실감안나는 현실에서 안주하기에, 현아는 너무나 바빴다. 기말고사 시즌이 다가옴과 동시에 준비할게 평소보다 적으면 다섯배, 많으면 열배 정도 많아진 덕에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느낄 정도로 바쁘게 일했다. 분명 주5일 근무인데 일주일이 월화수목금금금같다. 가뜩이나 중간고사때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서 중위권 애들이 별로 없었다는 꾸중을 들은 탓에 이번에는 더 심화된 언어 문제들을 만들어내야 해서 그저 죽을 맛이었다. 사실 그때 문제 낸건 자기가 아니라 선배 김선생이었는데, 짬밥 없는게 죄라며 자기가 다 뒤집어 썼다.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김선생의 정강이를 후려차주고 싶을 정도였다.









“현아쌤, 좀 쉬면서 해.”

“아, 네…. 근데 남은 게 좀 많아서….”

“어디봐. 와~ 뭐야 이거 진짜 현아쌤이 다 만든 문제?”

“네….”





동료 교사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는데 블랙 커피여서 인상을 찡그렸다. 민망해서 말은 못하는데 현아는 설탕을 넣지 않으면 마시질 못했다. 하지만 마시라고 호의로 준건데 죽을상 할 순 없어서 괜찮은 척 억지로 삼켰다. 여자는 몇 번이나 현아가 낸 문제를 살펴보면서 탄성과 함께 칭찬했다.







“근데 이걸 애들이 푸는 애가 몇 명일지 모르겠네. 이정도면 수능 심화문제야!”





하하하. 교감쌤이 이렇게 내라는데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지. 그 말은 차마 못하고 헤헤 웃어넘겼다. 방금 옆에서 조잘거리던 동료 교사는 처음에 이 학교로 부임해왔을 때, 어린 나이에 인맥으로 온거라며 제일 먼저 자신을 구박한 교사였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교사라기보단 아이돌에 가까운 외모였던 탓에 열광하다 못해 신봉하는 학생들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가 생겨서 질투심에 의해 그랬다고하지만. 아무튼 처음엔 정말 못살게 굴었지만 교직원 회식때 술에 취해 찡찡거리며 서럽다고, 힘들다고 펑펑 우는 일 이후로는 현아를 자기 딸 대하듯 어화둥둥하게 되버렸다. 물론 현아로써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잠시동안 그때의 보람찬 추억(?)에 빠져있던 현아는 금새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문제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음, 소설 문제도 냈고 비언어 영역에서도 4문제나 냈고, 아이들이 욕하다 못해 증오하는 고전 문학 부분에서는 무려 5문제나 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현아가 아니었다면 아마 욕하다 못해 책상 위에 죽은 쥐까지 놓고 갈 정도의 난이도였다. 이제 한문제만 내면 자기가 맡은 양을 다 채우는 건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마지막 문제를 위해 자료를 찾는데, 할만한 건 많은데 마땅한게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동화 세가지 소원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나 다 아는 동화인데 왜 이런게 눈에 들어왔을까. 그러다가 문득 두칸이나 건너편에 있는 수학 선생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하라와 시선을 마주쳤다. 하라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몸이 안보일 정도로 숙이고선 교사의 말에 집중했다.









“뭐야….”







심통이 났다. 왜 하라가 자기를 피한단 말인가. 월요일에 출근 했을 때, 항상 아침에 저보다 먼저 와서 방실방실 웃으며 대기하고 있을 하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허전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전에 당황스런 일들이 있었고해서, 아직까지도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아 그런거라고 여기며 있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하라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현아짱팬이라는 타이틀까지 동료 교사들한테 거머쥔 하라가 보이질 않자 교사들은 이제 연예인으로 전향한거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하라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현아였다. 스스로 머리가 어떻게 된건지도 모르겠지만, 주말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결과 현아 또한 하라가 그리 싫지만은 아닌거라는 결론에 달했다. 물론 스스로가 교사고, 하라는 제자고, 그리고 둘 사이에는 지켜야할 금기가 있기에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마음을 인정한 건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하라와 대화를 통해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싶었다. 물론 하라에겐 자기가 생각하는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니겠지만, 하라를 황량한 사회에서 아픔받게 하기보단 차라리 자기가 악역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올바른 길을 벗어난 걸 제자리로 잡앚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학생들이 더욱 더 바빠지는 시험기간이 되가면서 얼굴은커녕 전화나 그 흔한 문자 한통도 보내오질 않았다. 전같았으면 귀찮다고 느낄 정도로 실시간 문자를 했었는데, 제대로 된 문자 하나 없이 핸드폰이 고요하니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심지어 대출 문자가 하라 문자인줄 알고 교직원 회의중에 빠져나와 확인을 한 다음에는 너무나 억울해서 벽을 발로 잘못 차서 양호실에서 한시간동안 누워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안봤던 하라가 며칠이 지나니까 바로 마음을 바꾼 줄 알고, 속시원하면서도 왠지 섭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된 일이긴 하지만 섭섭하다니. 아이러니한 감정에 스스로도 궁금했다. 아직까지도 전의 그 격렬한 키스의 여운이 남아있어서 그런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다시금 그때의 기억이 마치 현실처럼 제 앞에 펼쳐져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분명히 이렇게까지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는데.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밤새도록 서로 이야기하고, 이해하려고 대화까지 했던게 무색할 정도의 결과였다. 그리고 하라가 자기를 이제 잊었는데 혼자서 하라 생각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스워서 이제 자기도 잊으려고 노력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기억에 뿌리박힌 하라의 처연한 얼굴이 떠올라 찜찜했다. 그런 와중에 때마침 하라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행여나 하라가 부모님에게 자기 둘 사이에 있던 일에 대해서 말한건 아닌가,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조금 두려운 마음으로 통화했는데. 하라가 현아의 집에서 지냈던 이후로 밥도 제대로 못먹고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울먹인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이틀전엔 병원에서 포도당 주사까지 맞고 왔다는 말을 들은 순간, 한순간이나마 저를 향한 하라의 곧은 마음을 의심한게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통화를 끊고 나서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 문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건만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 스스로가 그렇게 삭막하고 애정없게 살아온 건 아니었는데. 누구보다 더 빛나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탓에 남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때 다 하는 키스도 하라와 한게 난생 처음이었다. 상상속에서만 가끔씩 꿈꾸왔던 첫키스는 상상 이상으로 정말 황홀했다. 처음엔 배려심 없는 하라의 키스에 겁부터 집어먹고 공포만 남아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씩 그때를 떠올려보면 공포 뒤에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건 눈부신 황홀함과 아쉬움이었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과의 키스는 이렇게 황홀한 건지 처음 알았다. 그때만큼은 하라가 차라리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까지 했었다.













볼일이 끝난 듯, 도망치듯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하라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방금까지 질문을 봐주고 있던 교사가 “이제 하라가 내 팬이 됐나봐. 하하.”라고 말하는데, 안에서 뭔가 빠직하는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긴 하는데, 이게 원인을 몰라서 더 답답하다. 다른 일 때문에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면 항상 눈치 빠른 구하라가 살랑살랑 다가와서 뭐가 그렇게 기분 안좋냐며 살살 꼬리치면 금방 풀렸었는데. 지금은 그 구하라 때문에 끓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교무실로 우리 학교의 군기반장 교감쌤이 들어오자 떠들썩한 분위기가 금새 공동묘지마냥 사그라들었다. 현아도 수학 교사의 설레발에 대꾸해주던 걸 멈추고 금새 고개를 숙여 한 문제 남았던 원고지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헉.”







구하라 바보멍청이똥개말미잘해삼변태산짐승. 도대체 이걸 누가 쓴거야. 분명 펜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자기니까 자신이 쓴건데 도대체…. 이게 다 구하라 멍청이때문이야. 펜으로 쓴거라 지우개론 지워지지도 않아 수정 테이프로 벅벅 문질렀다. 덕분에 한 장을 다시 써야하는 수고를 하게 만들어준 하라를 다시 한번 속으로 깠다. 서른 장이 넘는 원고지를 쉴 새 없이 쓴 후폭풍이 지금에서야 밀려왔다. 팔이 자기 팔이 아닌 것처럼 얼얼했다. 교감이 감시망을 펼치고(우리 학교에선 교감을 캐리어의 인터셉트라고 불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있어서 앞으로 두 손을 잡고 뻗었다. 얼마나 집중했던건지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옆자리 교사에게까지 들렸는지 이쪽을 보고 피식 웃는 바람에 민망함이 확 올라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멋대로 섞여있는 원고지들 사이로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가만히 원고지를 내려다보던 현아는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원고지 위에는 방금전까지 생각하다 멈춘 ‘세가지 소원’이 적혀있었다. 단지, 그 단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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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어요.”

“응, 가까이 와봐.”

“괜찮은데….”









아이는 도무지 현아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정규 수업이 다 끝나고 야자를 앞둔 저녁 시간. 하라를 불러내려고 무슨 일을 했던가, 제일 간단하게 하라의 단짝인 승연을 불러 상담할 게 있으니 저녁 시간에 잠깐 오라고 전해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당연히 알았다고 할 줄 알았던 대답은 어색하게 웃는 승연이가 ‘하라가 좀 아파서, 못온다고…’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라가 자신을 더 이상 싫어해서, 그래서 부담스러워해서 그런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얄미웠다. 남의 첫키스를 가져가놓고 이렇게 발뺌하다니.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도 도무지 쪽팔려서 말해주지 못하는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사실 스물다섯살까지 키스 한번 못했다고 하면 분명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니깐. 그래서 참을 인자를 한 개 그리며 직접 여자 교직원 휴게실로 오라고 문자까지 보냈는데 전화는커녕 답장도 오질 않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구하라가 바로 앞에 있으면 바로 정강이를 까버릴 정도로 화가 났다. 자기가 뭐가 아쉬워서, 정말 다른 맘은 없고 하라가 잘 되길 바라는 맘에서 이렇게까지 해주는건데. 어디가서도 한번 퇴짜맞기는커녕 오히려 봐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수두둑한 자신인데, 두 번이나 6살이나 어린, 그것도 첫키스를 뺏어간 여제자한테 퇴짜를 맞으니 모든 일이든 유순하게 넘어가는 현아라도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말 한번만 더 퇴짜맞으면 수업중이건 시말서를 쓰건 교실로 찾아가서 그 잘난 정강이를 전치 6주치의 파워로 때릴 계획이었다. 정말, 이름 석자를 걸고.









‘더 이상 볼일 없…’

‘끝장내기전에 튀어와.’

‘왜, 왜요….’

‘진심이야.’

‘…….’

‘내가 갈까?’

‘갈게요...’











안본지 불과 일주일을 조금 넘은 것 뿐인데, 하라는 눈에 띌 정도로 홀쭉해져있었다. 안그래도 너무 말라서 ‘넌 밥을 남들보다 두배 먹어야돼.’라고 말해줄 정도였는데 더 말라있으니 꼭 시체가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걱정어린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가까이 오라는 말에 도리질치던 하라는 현아가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갔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꾸만 심장이 덜컹거려서 허리 뒤로 숨긴 손이 덜덜 떨렸다. 다시 한번 현아에게 몹쓸 짓을 하면 지금 이렇게 보는 것도 다신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이를 악물고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현아는 폴짝 내려왔다. 그에 맞춰 이번엔 하라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순전히 현아를 위해서였다.









“많이 홀쭉해졌네.”

“별로요….”







인사치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교사와 제자 사이에서 이뤄질만한 대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하라는 현아와 짧게나마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자기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뺨을 때리고 더럽다고 욕했을 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현아는 예전과 독같은 몸짓으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미련할 정도로 착한 여자. 그래서 자기가 현아를 좋아하고 있는거겠지. 하지만 기뻤던 마음도 잠시, 살을 에는 듯한 두려움이 다시 엄습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걸까. 하지만 하라는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지금껏 알아왔던 현아에게서 전혀 의외의 말을 들었다. 한발자국 더 다가온 현아의 얼굴은 지금껏 보아왔던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현아는 진심으로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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